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제주 4.3 사건/전개 (문단 편집) == 초토화 작전과 집단 학살 == || [[파일:토벌대를 격려하는 이승만.jpg|width=100%]] || [[파일:체포된 사람들.jpg|width=100%]] || || 토벌대를 격려하는 [[이승만]] 대통령 || 토벌대에 체포된 사람들.|| >군은 [[한라산]] 일대에 잠복하여 [[천인공노]]할 만행을 감행하는 매국 극렬분자를 소통하기 위하여 10월 20일 이후 군 행동 종료기간 중 '''전도(全島) 해안선 5km 이외의 지점 및 산악 지대의 무허가 통행금지를 포고함. 만일 차 포고에 위반하는 자에 대하여서는 그 이유여하를 불구하고 폭도배로 인정하여 총살에 처할 것임.[* 즉, 섬 바닷가에서 산으로 5km만 들어가면 무조건 초토화라는 소리였다. 당시 제주도는 섬이긴 했어도 조선시대부터 큰 배를 만드는 것을 금해서 어업이 그렇게 발달하지 못했다. 그렇기에 산 중간층에서 밭을 이루고 살아가는 소농들이 해안선에 몰려 사는 사람만큼이나 많았다. 이런 섬에서 해안선을 제외한 모든 곳을 초토화시킨다는 건 진압대가 얼마나 무지한지를 단적으로 보여준다.(그러나 해안마을 중에서도 곤을동처럼 피해를 입은 지역도 있었다.) 결국 이러한 [[탁상행정]]의 말로는 죄 없는 수만 명의 죽음이었다.]''' 단, 특수한 용무로 산악지대 통행을 필요로 하는 자는 그 청원에 의하여 군 발행 특별통행증을 교부하여 그 안전을 보증함. >---- >1948년 10월 17일, 제9연대장 [[송요찬]] 소령이 발표한 포고문 中 >"아, '''떼죽음당한 마을이 어디 우리 마을뿐이던가.''' 이 섬 출신이거든 아무라도 붙잡고 물어보라. 필시 그의 가족 중에 한 사람이, 아니면 적어도 사촌까지 중에 누구 한 사람이 그 북새통에 죽었다고 말하리라. 군경 전사자 몇백과 무장공비 몇백을 빼고도 5만 명에 이르는 그 막대한 주검은 도대체 무엇인가?" >---- >[[현기영]], 「순이삼촌」 中 >"처녀 때. 가다 보면 [[결7호 작전|일본군인들이 총 메고 말 타고 지그락지그락 다녀도 본 척도 않고 그냥 지나가지, 아무 말도 않더라고.]] 무섭지 않았지. 나는 4.3 사건 때야 사람 무서운 거 알았어요." >---- >4.3 수형 생존자 송ㅇㅇ 씨 증언 > 송요찬의 포고령은 여순사건 직전에 발표됐고, 언론에 보도된 시점은 여순사건이 발발한 다음날이었다. 이에 따라 여순사건은 제주도 토벌을 부추기는 촉매제가 됐다. 제9연대는 제11연대의 '무행동 전략(do-nothing policies)'을 '무차별 테러통치(indiscriminate reign of terror)'로 대체했다. 송요찬이 '해안선에서 5km 이외의 내륙지역'을 '적성지역'으로 간주해 위반자에 대해 총살하겠다는 것은 대게릴라전에서 나타나는 '자유발포지대(free fire zone)'의 설정이었다. 그러나 이는 그 지역내 모든 주민들을 '적'으로 간주하는 것은 물론 그들의 생존수단까지도 파괴했다. 베트남전에서도 한 지역이 '자유발포지대'로 선언되면, 지상군이나 공군은 그곳에서 보이는 사람은 누구든지 적군으로 간주했다. >---- > 허호준, 『4.3, 미국에 묻다』, 선인, 2021, p.212 1948년 5.10 선거 실패 이후 경찰의 증강에도 불구하고 무장대의 공세가 수그러들지 않자 미군정은 제2차 세계대전 시기 아시아 대륙을 누볐던 야전군 출신인 브라운 대령을 '제주도 최고 지휘관'으로 임명해 제주도 작전을 총지휘하도록 했다. 하지 중장은 제주도 제59군정중대와 제주 CIC에도 모든 가능한 방법으로 브라운 대령을 지원하도록 명령했으며, 이에 따라서 제주도에 대한 무자비한 무력진압을 추구했다. 제주도 지부 지휘관이 된 브라운 대령은 이른바 '평정작전(Pacification Plan)'을 진행했다. 당시 미군정은 소위 6.23 재선거 실시를 위해 '중산간 지역 고립 및 검거작전'을 벌였는데, 이는 제주도민 대량 검거 사태를 불러왔다. 이처럼 제주도에서 미군정 수뇌부의 지휘와 관심에 따라 강력한 토벌전이 전개되 많은 제주도민이 체포되고 인명피해가 급증하기에 이른다.[* 허호준, 『4.3, 미국에 묻다』, 선인, 2021, p.180~185] 1948년 6월 북제주군 조천면 북촌리 집 앞 굴 속에 숨었다가 형제 주민들과 함께 붙잡힌 강서수씨는 이후 다음과 같이 증언했다. >밤에 숨었다가 날이 밝아갈 때 붙잡혔는데, 나와서 보니 경찰관들이 죽 포위를 했더라고. 모자를 보니까 졸병들이 아니고 높은 놈들 같았어. 미국놈들 하고. 굴에서 나오니까 우리에게 수갑을 채워가지고 동쪽을 향해 엎드리라고 해. 사복을 입은 미국사람들은 키가 큰 놈들이었는데 세명인가 네명인가 돼. 따로 한 차를 탔으니까. 미국놈들이 '빨갱이' '빨갱이'하고 한국말을 하면서 총을 갖고 쏘는 시늉을 하는거야. 미국놈이 지시하면서 경찰관들이 같이들 막 모여들어. 우리는 경찰차에 타고 미국인들은 자기네 차에 타서 같이 제주시로 넘어갔지. 1948년 8월 15일, [[대한민국 정부]]가 수립되고 9일 후인 24일 대한민국과 미국은 양자 간에 [[https://www.archives.go.kr/next/search/listSubjectDescription.do?id=006389&pageFlag=&sitePage=1-2-1|한미군사안전잠정협정]]을 맺었다. 이 협정에 의거하여 미군이 완전 철수할 때까지 주한미군사령관은 한국군의 작전통제에 참여하게 되었다.[* 이것은 제주 4.3 사건에 있어서 미국의 책임 문제와 연결된다. 주한미군의 철수는 1949년 6월경에 이루어졌는데, 1948년 말부터 제주도에서 초토화 작전과 집단 학살이 자행되었다.] 한국군을 지휘하고 통제하기 위해서 주한미군으로부터 '임시군사고문단'이 파견됐다. 그러는 사이 10월에는 '''제주도로의 파견을 반대'''하며 좌익 성향의 군인들이 [[여수·순천 10.19 사건|여순사건]]을 일으켰다. 또 이 때 제주도 근해에 [[소련]] 선박이나 잠수함이 출현했다는 소문이 퍼졌다.[* <제주4.3사건진상조사보고서>에 따르면 이 소문은 완전히 근거 없는 낭설이었으며, 강경 진압에 대한 반대 여론을 무마시키기 위해 조작되었을 가능성이 높다고 한다.] 그리하여 점차 대대적인 토벌전이 준비되기 시작했다. 1948년 9월부터 소강상태는 종료되고 군인들과 경찰들이 육지로부터 제주도로 차츰 파견되었으며, 그나마 제주도민들에게 호의적인 태도를 보이던 김봉호 경찰청장이 경질되었다. 10월 11일에는 '제주도경비사령부'가 설치되어 사령관으로는 김상겸, 부사령관으로는 [[송요찬]]이 각각 임명됐다. 10월 17일, 송요찬은 포고문을 발표하여 '''"해안선으로부터 5km 바깥에 있는 지역에 통행금지령을 내리고 허가 없이 그 안에 있는 사람은 폭도로 간주해 총살하겠다"'''는 무시무시한 결정을 내렸다. 하지만 이 결정은 중산간마을[* 제주도에는 '해변마을'과 '중산간마을'이 있는데, '중산간마을'은 산 쪽에 위치하여 있는 마을을 말한다.] 거주민들에게는 청천벽력 같은 말이었다. 이 포고문은 그들에게 있어서 생활터전 자체를 포기하라는 명령이나 다름없었다. 그래서 그들은 해안으로 내려와야 살 수 있는데도 내려오지 못했다. 그럼에도 다음 날부터 해안은 전면적으로 봉쇄되었고, 군경은 중간산마을을 비롯한 산악지역을 적지(敵地)로 간주했다. [[여수·순천 10.19 사건|여순사건]]이 터진 후에는 더욱 심해져서 서북청년회 회원들이 대거 제주도로 내려와 군인과 경찰 행세를 했다. 또 제주도민들을 대상으로 [[민보단]]을 조직해 무장대를 막으려고도 했다. 마침내 1948년 11월 17일, [[이승만]] 대통령은 제주도에 [[계엄령]]을 선포했고, [[송요찬]]을 계엄사령관으로 임명했다. 이 계엄령 선포에 대해 불법이었는지에 대해 논란이 되고 있다. 제헌헌법에는 제64조에 "대통령은 법률이 정하는 바에 의하여 계엄을 선포한다"라고 써 놓았고 제헌헌법 제99조에는 "법률의 제정 없이는 실현될 수 없는 규정은 그 법률이 시행되는 때부터 시행한다"고 명시되어 있는데, 계엄령 선포 당시 계엄령을 선포할 수 있는 법률이 존재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계엄령과 관련된 법률인 '계엄법'은 1949년 11월 24일에 제정된다.] 이에 대해 계엄령 선포가 적법했다는 측은 제헌헌법 이전의 법령인 일본의 계엄법이나 미군정 아래에서 계엄령이 폐지되지는 않았다는 점, 제헌헌법 제100조에는 "현행법령은 이 헌법에 저촉되지 아니하는 한 효력을 가진다"고 명시한 점 등을 들어 계엄령이 법적 근거가 있다고 주장한다. 이 논란으로 인하여 이승만의 양자가 소송을 건 일이 있었는데, 법원은 그에 대한 판단을 유보했다. 계엄령 선포는 제헌국회에서도 논란이 되었다. 야당 국회의원들이 당시 법무장관이었던 [[이인]]에게 계엄령의 허점을 지적하며 [[위헌]] 아니냐고 묻자, 그는 계엄법의 부재를 인정했지만 "계엄령은 급박한 때에 현지 군사령관이 하는 것", "단지 동란을 방지하는 응급조치의 수단에 불과한 것"이라면서 얼버무렸다. 계엄령을 토대로 군경토벌대는 본격적인 진압에 들어갔다. 토벌을 위해 군경은 해안을 통제하고, [[언론]]에 재갈을 물렸다.[* 언론인도 군경토벌대에 의해 희생됐다. [[경향신문]] 제주지사장이었던 현인하는 헌병대의 경향신문사 조사를 거부했다가 처형당했다. [[서울신문]] 제주지사장인 이상희도 비슷한 이유로 살해됐다. 1948년 11월에는 군경이 대놓고 [[검열]]을 하며 언론을 자기 마음대로 통제했다.] 제주도는 외부로부터 고립되었다. 1948년 11월 중순부터 '''초토화작전'''이라고 불리는 강경 진압이 시행됐다. 중산간지대의 마을들과 주민들이 주요한 진압 작전 대상이었다. 또한 미군정은 남한 단독 정부 수립을 위해 내부의 불안요소 제거를 명분으로 제주도에서 경비대와 경찰을 이용해 소탕작전을 지속했다. 군경토벌대[* 이 때 파견된 경찰 중에서 경무부(현 [[대한민국 경찰청]]) 작전과장 [[최치환]] 총경이 작전참모로 파견되었다. 참고로 최치환은 김무성 [[새누리당]] 대표 최고위원의 장인이다.]는 중산간마을을 돌아다니면서 닥치는 대로 주민들을 [[폭도]]로 간주해 학살했다. 그리고 마을에 불을 질렀다. 상상을 초월하는 끔찍한 일들이 학살 도중에 벌어졌다. 토벌대는 주민들을 집결시키고 '''가족끼리 말을 태우게 하거나 뺨을 때리게 했다.''' 만약 조금이라도 주저한다면 마구 구타했다. 반항하면 그 자리에서 총살하는 일도 있었고, 총살자 가족에게 '''총살당하는 사람을 보게 하며 만세를 부르고 박수를 치게 했다.'''[* 제주도 표선면 가시리에 사는 안공림(58) 씨는 8살 때 총살장에서 박수를 쳤는데, "너무도 끔찍해 눈을 뜰 수 없었지만 벌벌 떨며 박수를 쳐야 했다"고 증언했다.] 그런가 하면 무장대로 변장하여 들어가 도움을 요청한 다음, 도움을 주면 바로 본색을 드러내 사살해 버리는 '함정 토벌'[* 토벌대였던 제2연대 특공대 장병들이 무장대로 변장한 사진이 남아 있다. [[:파일:무장대로 변장한 토벌대원들.jpg|실제 사진]] 그 사진에는 '''"폭도(暴徒)로 가장(假裝)코"'''란 글이 선명하게 적혀져 있다.], 자수를 종용하며 명단이 있으니 거짓말하면 재미없다며 으름장을 놓다가 사람들이 자수를 하면 바로 처형해 버리는 '자수 사건'도 있었다. 처형 대상인 사람이 없자 그 사람의 가족을 데려다 '''대신 죽여 버리는 '대살(代殺)''''과[* 대살은 중산간지대뿐만 아니라 해안지대에 대피한 사람일지라도 처형 대상이 되었다.] 마을 주민들을 모아놓고 학살을 벌이는 '관광총살'도 횡행했다. 어떤 곳에서는 군경토벌대가 주민들을 대상으로 '''사살연습'''을 벌이기도 했다. 그렇게 마구잡이로 학살된 사람들은 토벌대에 의해 모두 '사살된 [[폭도]]'가 되었고, 학살행위는 '공적'으로 치하되었다. 한편 학살을 피해 마을을 탈출한 사람들은 한라산 인근을 떠돌아다니면서 동굴이나 숲에 숨어야 했는데, 군경토벌대는 이런 사람들까지도 색출해 학살했다. 이런 끔찍한 일들로 인해 제주도에서는 '이름 빼앗기지 말라'는 유행어가 나돌았다.[* 이 말은 "토벌대에 끌려가는 사람 눈에 띄었다간 공연히 그 사람이 자기 이름을 불어 자신도 끌려가 죽을 수 있을 테니 조심하라"는 뜻이다.] 토벌대 중에서는 [[서북청년회]] 소속 대원들이 가장 악랄했다. 이들은 노인, 어린이, 아기 등 나이와 성별을 가릴 것 없이 일반 서민들을 빨갱이와 한통속으로 치부하여 모조리 죽여버렸다고 한다. 이들 서북청년회는 월남한 지주나 이북 출신 [[조직폭력배]], 개신교도, 극우세력 장정들이 주류로서 제주에서 화풀이와도 같은 만행을 저질렀고, 진압군 중에서도 가장 악명이 높았다.[* 얼마나 잔혹했냐면 '''같은 우익들마저도 그들을 외면했다.''' 실제로 그들이 민간인이라 할지언정 [[6.25 전쟁]], 혹은 그 후에 벌인 짓들을 보면 '''전쟁범죄자와 다를 바가 없다.'''] || [[파일:강요배 천명.jpg|width=100%]] || || <천명(天鳴)>, [[강요배]], 1991 || [youtube(zuta1fEcC3Q)] >작전명령에 의해 '''소탕된 것은 거개가 노인과 아녀자들'''이었다. 그러니 군경 쪽에서 찾던 소위 도피자들도 못 되는 사람들이었다. 그런 사람들에게 총질을 하다니! 또 도피 생활을 하느라고 마침 마을을 떠나 있어서 화를 면했던 남정네들이 군경을 피해 다녔으니까 도피자가 틀림없겠지만 그들도 공비는 아니었다. 사실 그들은 문자 그대로, '''공비에게도 쫓기고 군경에게도 쫓겨 할 수 없이 이리저리 피해 도망다니는 도피자'''일 따름이었다... (중략) 도피자 아들을 찾아내라고 여든 살 노인을 닦달하던 어떤 서청 순경은 대답 안한다고 어린 손자를 총으로 위협해서 무릎 꿇고 앉은 제 할아버지의 따귀를 때리도록 강요했다. 닭 잡아 내라고 공포를 빵빵 쏘아대기도 했다. >---- >[[현기영]], 「순이삼촌」 中 >무명천 할머니는 제주 4.3 사건 당시인 >1949년 1월 12일 한경면 판포리에서 >토벌대의 총격으로 >'''아래턱을 소실하였다.''' >그 후, 정상적으로 말을 하거나 먹지 못한 채 >소화불량 및 관절염 등 후유장애를 앓다가 >2004년 9월 8일 향년 나이 90세로 >생을 마감하였다. >---- >학살피해자 [[무명천 할머니]](본명 진아영)의 생가에 있는 소개글 >'''"저 한길을 대낮에 한번만 걸을 수 있으면 죽어도 한이 없겠다"''' - 생존자 김순애 씨의 증언 中 가장 대표적인 사건이 49년 1월 17일에 벌어진 [[http://43archives.or.kr/viewHistoricSiteD.do?historicSiteSeq=39|북촌리 학살사건]]이다. 북촌리 부근의 제2연대 3대대의 일부 병력이 무장대의 기습을 받아 군인 2명이 목숨을 잃었다. 이에 놀란 마을 원로들을 포함한 주민 10명이 시신을 싣고 직접 대대 본부가 있는 함덕군주둔소를 찾아갔으나 군인들은 흥분하여 마을 원로들을 포함한 9명을 무참히 살해한 후[* 1명은 경찰 가족이라 제외되었다.], 북촌리에 나타났다. 군인들은 북촌리 주민 1천여 명을 집결시키고 주민 전체가 빨갱이라는 죄목을 씌우는 등 억지 핑계를 대며 민보단 책임자를 제일 먼저 사살했다. 주민들이 동요하자 위협사격을 가했는데, 이 때 사격으로 젖먹이를 안고 있는 여인들이 목숨을 잃었다.[* 목격자에 증언에 따르면 아기가 죽은 어머니의 젖을 열심히 빨았는데 그것이 잊혀지지 않는다고 한다.] 공포에 잠긴 주민들에게 토벌대는 군경 가족을 골라낸 다음, 나머지는 수십명씩 끌고가 마을 주변의 옴팡밭에서 모조리 총살했다.[* 제주경찰서 차량계 소속으로 근무하다 운전요원으로 차출되었던 한 경찰관은 이 사건에 대해 "한 장교가, 우리 사병들은 적을 사살해 본 경험이 없으니 [[무슨 마약하시길래 이런생각을 했어요?|'''적을 사살하는 경험도 쌓을 겸 몇 명 단위로 데려가 총살시키자''']]는 제안을 했는데 그게 채택되었다고 한다.] 학살은 북촌초등학교를 중심으로 서쪽 '너븐숭이'와 동쪽 '당팟' 등 2곳으로 나눠 이뤄졌고 이 일로 300~460여 명의 주민들이 목숨을 잃었다. 또 군인들이 불을 지르는 바람에 마을 전체가 불에 타 잿더미로 변했다. 이 사건은 제주 4.3 사건 당시에 일어난 학살 사건으로는 최대 규모였고[* 세계사적으로도 한 마을이 학살로 인한 희생자 수가 이렇게 많은 것은 드물다고 할 정도다.], 이 일로 인해 북촌리의 [[성비]]는 한동안 [[여초]]였다고 한다.[* 1960년 [[4.19 혁명]] 이후에 언론이 북촌리에서의 학살을 보도했는데, 당시 이 마을의 남녀 유권자 비율이 3대 1에 가까울 만큼 남자들이 희소했다고 전할 정도였다.] 그런데 군경은 이런 자신들의 학살 행위를 무장대의 행위라고 왜곡해 서술해 놓았다. 또 다른 사례로는 [[http://www.43archives.or.kr/mobile/viewHistoricSiteD.do?historicSiteSeq=2|다랑쉬굴]]에서 일어난 일이 있다. 구좌읍 종달리와 하도리에서 살고 있는 주민들은 1948년 12월 경에 구좌읍 세화리에 있는 다랑쉬 오름 근처의 굴로 피난을 와 있었다. 그런데 군경토벌대가 그 위치를 알고 안에 있던 사람들 보고 나오라고 했다. 사람들이 나오지 않자 토벌대는 굴 입구에 불을 지폈다. 결국 연기에 질색하여 11명이 목숨을 잃었다. 사망자 중 3명이 여성이었고 아홉 살 아이도 포함되어 있었다. 다랑쉬굴은 1992년에야 발굴되어 그 전모가 알려졌다. || {{{#!folding ※ 초토화작전 시기의 피학살지 : 펼치기 · 접기 [[파일:4.3 희생자 분포지도.jpg|width=100%]] [[http://www.4370jeju.net/bbs/content.php?co_id=site&me_code=5020|4.3 유적지]] [[http://www.4370jeju.net/bbs/content.php?co_id=road&me_code=5010|4.3 길을 걷다]]}}} || || {{{#!folding ※ 초토화작전 시기 학살 사례/증언/자료 : 펼치기 · 접기 >제주 유생 김경종은 이승만 각하께 편지를 올립니다. (중략) 경찰은 산골로 도피한 자들을 쫓지 않고 바닷가 마을로 소개된 사람들을 체포하여 한 장소에 모아놓고 눈을 감게 명령을 내리고는 한 번 순찰을 합니다. '''눈을 감으라고 거듭한 연후에 매수한 사내를 시켜 지목하게 합니다.''' 매수한 사내의 가리킴이 많으면 얻은 것도 또한 많아집니다. 그러므로 저쪽을 가리키고 이쪽을 가리키고 동쪽을 가리키고 서쪽을 가리키는대로 모두 죽여버립니다. 이 무슨 참담한 지경입니까? (중략) 어찌 그 칠팔십의 노약자와 부녀자, 어린 아이들에게 이와 같이 참혹하게 할 수 있습니까? 군인들이 지나간 곳에는 옥석이 함께 불타지만 얼굴에는 혹여 괴이치도 않습니다. 이른바 지방치안의 책무로써 '''그 무고한 사람들을 죽이는 것을 즐기는 것처럼 합니다.''' >---- >제주지역 유학자 김경종[* 석우(石友) 김경종(金景鍾, 1888 ~ 1962)는 제주시 칠성로에서 한약방을 운영하면서 제주지역의 유림들과 교류하던 한학자이자 시인이었다. 그는 제주 4.3 사건으로 인해 아들을 잃었다. 그리하여 그는 이승만에게 호소문을 보내 군경의 폭력적인 진압을 규탄하였다. 한국전쟁 발발 직후인 1950년에는 '이승만 성토문'이라는 글을 써서 "옛날 [[항우|항적]]은 [[신안대학살|진나라의 항복한 병사 40만 명을 살해하였다.]] 만세에 모두 무도하다고 일컫는다. 지금 [[이승만]]이 나라 안 [[보도연맹 학살사건|죄수 수십만여]] [[국군의 형무소 재소자 학살|명을 죽였으니]] '''포학무도함이 항적과 더불어 어떠한가'''"라며 이승만을 규탄하기도 했다. [[http://www.hani.co.kr/arti/society/society_general/200603.html|#]]]이 [[이승만]] 대통령에게 보낸 [[http://www.jejusori.net/?mod=news&act=articleView&idxno=133243|호소문]] 中 >[[정방폭포]] '소남머리'는 정보과에서 취조 받은 주민들 중 즉결처형 대상자들 대부분이 희생당한 곳이다. 흔히 정방폭포에서 희생당했다고 하는 희생자 대부분이 정방폭포 상당과 이어지는 이곳에서 총살당했다. '소남머리'는 동산에 [[소나무]]가 많다고 붙여진 이름이다. 당시 서귀중학교 학생이었던 송세종씨는 "그때 당시 어디 여자인지는 모르지만, 도망가다가 절벽으로 떨어졌는데 노송에 걸렸어. 그 여자가 임신을 하고 있었지. 떨어지니까 군인들이, 이건 하늘이 도운 사람이라 해가지고 살려줬어. 사람 두 번 죽인다는 것이 없으니까. 나도 직접 눈으로 본 건 아니지만"이라고 회고했다. 서귀리 및 서귀면, 중문면 일대뿐만 아니라 남원면, 안덕면, 대정면, 표선면 주민에 이르기까지, 정방폭포 희생자들은 삼남 지역 전체에 이른다. >---- >[[정방폭포]]와 그 인근에서의 학살 사례 >토벌대가 마을을 불태우자 온가족이 인근 야산에 숨어 지냈습니다. 그러다 1949년 1월 9일 군인들에게 발각됐습니다. 군인들은 아버지를 현장에서 총살하고 어머니와 우리 5남매를 학교에 가두었습니다. (중략) 군인들은 [[학살|수감자를 죽이기 시작했습니다.]] '''특별한 원칙도 없이''' 20세부터 50세에 이르는 사람들을 지목하며 '너 나와!'하며 끌어냈습니다. 1월 11일에는 어머니가 지목됐습니다. 어머니는 피신중 딸을 날아 보름도 지나지 않았을 때입니다. 어머니를 포함해 10여 명이 함께 끌려 나갔는데 곧 총성이 울렸습니다. 아버지에 이어 어머니마저 돌아가시니 우린 졸지에 [[고아]]가 됐습니다. >---- >[[대정읍]] 하모리 주민 김명원의 증언 >홍성강. 나이 45세. 민보단장. 학살집행자는 2연대 특별중대장 소위 김우희. '''[[이승만]] 사진을 사지 않는다 해서 적개심을 품었고...'''' 그리고 다이너마이트를 공비 소탕용으로 사용 허가를 받았으나 전(前) 부대가 이동하였기에 그자는 [[누명|군인을 죽이려고 한 것]]이다 하여 죄목을 붙였음. 수감년원일 48년 12월 29일. 학살년원일 49년 1월 2일 오후 4시경. 학살장소 성산포 우뭇개동산. '''너무나 원통하니 원한을 풀어 주시오.''' >---- >1960년에 국회가 작성한 「양민학살사건진상조사보고서」에 적힌 성산면 오조리의 학살사례 >사람들이 학살되어 묻힐 구덩이는 민보단원들에게 시켜 미리 파게 했어. 지금은 비행장이 들어서 버렸는데 마을 남쪽에 '궤동산'이라고 한 데가 있어. 실려온 사람들은 버스로 두 대, 한 80여명은 넘을거라. 그 사람들 옷을 전부 벗겨서 구덩이 가에 전부 세우더니만 민보단원들에게 죽창과 철창으로 찔러 죽이라고 했어. 그후에 기관총으로 바드드드 하게 쏘아 죽여버렸어. 시체들은 그 웅덩이에 담아 묻혀 있다가 나중에 비행장이 확장될 때 그 속에 포함되어 버렸지. 지금도 그곳 활주로를 들추어 내면 수많은 시체들이 나타날 것이여. >---- >도두리 주민 김예봉의 정뜨르 비행장(현재 [[제주국제공항]]) 학살사례 증언 >포로들이 수송되어 온다. 자동차에 가득 실려 가는 젊은 사람들, 도보로 철덕거리며 끌려오는 노소에서 부녀까지 끼어 있는 일련, 비는 아직도 개지 않는다. 구부린 채 말 없이 이끌려 가는 그들의 안색은 그들의 의복과 같은 색깔이다. 감히 그들을 어느 모로 보아야 폭도라고 부를 수 있을는지. 육십이 넘은 늙은이며 부녀자까지 무엇 때문에 폭도로 규정받지 않으면 안 될 처지가 되었는가... >--- >조덕송, 「유혈의 제주도」, 신천지 1948년 7월호 >경찰은 먼저 아들을 패기 시작했습니다. 보다못한 부친은 "우리는 소개민이다. 아들은 4대 독자이다. 살려달라"고 애원했습니다. 그러자 부친을 구타했고 그 노인은 매를 견디지 못해 금방 죽었습니다. 부친이 죽자 아들이 도망을 쳤지만 150미터 정도 도망치다 총에 맞았습니다. 그 장면을 보고 공포에 떨고 있는데 이번엔 어떤 여자를 지목해 끌어냈습니다. 25세쯤 되는 [[임산부]]였습니다. 경찰은 그 여인의 겨드랑이에 밧줄을 묶어 큰 괭나무에 매달아 놓은 후 경찰 3명이 '''총에 대검을 꽂아 찔렀습니다.''' 차라리 총으로 쏠 것이지, 차마 눈뜨고 볼 수 없는 장면이었습니다. 모두들 고개를 돌리자 경찰은 [[인간말종|"잘 구경하라"]]며 소리쳤습니다. 이어 경찰은 주민들을 선별하기 시작했습니다. (중략) 어머니의 눈물어린 호소로 10살 난 동생은 풀려났지만 내게는 "눈망울이 둥글둥글한 게 폭도들에게 연락함직한 놈"이라며 풀어주지 않았습니다. (중략) 총소리가 요란하게 나자 바로 옆에 나란히 묶인 어머니가 나를 덮치며 쓰러졌습니다. 총에 맞은 어머니의 몸이 요동치자 내 '''몸은 온통 어머니의 피로 범벅이 됐습니다.''' 경찰들이 "총이 덜 맞은 놈이 있을지 모른다"면서 일일이 대검으로 찔렀으나 그때도 난 어머니 밑에 깔려 무사했습니다. (중략) 만일 영화나 연극으로 만든다면 난 그 날의 모습들을 똑같잉 재연할 수 있을 정도로 너무도 눈에 선합니다. '''어떻게 잊을 수 있겠습니까.''' >---- >애월면 하귀리 주민 안인행(당시 13세)의 증언 >어느 날 군인들이 사람들을 무조건 끌어내고 집에 불을 붙였어. '이거 다 폭도 새끼다'하면서 젊은 남자 십여 명을 앞바다에 세워놓고 총을 쐈어. 나머지 나이든 남자들은 어디론가 끌고 갔지. 죄명은 공비와 내통하고 자식들이 산에 올라갔으니 사형을 시킨다는 거였어. 자기 이름도 못 쓰는 죄 없는 사람들에게 말이야. 바닷물 위에 묶어놓은 시체는 물이 내려가면 내려가고 올라오면 올라왔어. 한 여자는 아이를 업고 남편 시체를 몰래 가마니로 덮어 놨어. '''전쟁, 전쟁해도 그런 전쟁이 없어. 다시 그런 일이 생긴다고 하면 자살해 버리지.''' >---- >곤을동 주민 문계생의 증언 >토벌대는 산에서 작전을 끝내고 내려오면서 송태삼(당시 무장대원) 등 '''여러 명의 [[참수|목을 끊어 왔습니다.]] 그 중엔 어린아이도 있었습니다.''' 대부분 자루에 담았는데 유명한 무장대원의 목은 자루 밖으로 노출시켰습니다. 주민들을 향사에 집결시켜 이를 보도록 했지요. 그런데 생포돼 끌려온 사람 중엔 우리 마을 허아무개도 있었습니다. 그는 참으로 순한 사람이었는데 산으로 도망쳤다가 잡힌 모양입니다. 토벌대는 그에게 송태삼의 목을 가슴에 안고 내려가도록 했습니다. >---- >서귀면 주민 변창호의 증언 >중문면 상예리의 강기주는 당시 제주경찰청 고위 간부인 강기천 총경의 동생이었다. 초토화작전이 막 시작되던 1948년 11월 중순께 서청이 상예리에 들이닥쳤다. 모두 죽을 위험에 놓였을 때 강기주는 "나는 강기천 총경의 동생입니다. 무고합니다."라고 말했다. 그러나 서청은 "경찰 간부면 다냐. 이 새끼는 더 악질이다."라며 그 자리에서 먼저 총살했다. >---- >중문면 상예리의 학살사례 >빌레못굴은 총 길이 11.749미터로 단일계통의 용암굴로는 세계 최장이라 하여 천연기념물 342호로 지정돼 있다. 어음리 지경에 있는 빌레못굴은 주민들이 자주 드나들던 목초지와 경작지 부근에 있었으나 4.3 때까지만 해도 몇몇 사람을 제외하면 그 존재가 거의 알려지지 않고 있었다. (중략) 아무튼 1949년 1월 6일 굴이 발각됐고 진압군은 그 속에 있는 사람들을 남녀노소 가리지 않고 모두 총살했다. 특히 이 때 '''경찰이 서너살 난 어린이들의 다리를 잡아 머리를 바위에 메쳐 죽였다'''는 이야기는 당시 진압작전에 동원됐던 민보단원들의 입을 통해 전해져 지금도 처절함의 상징으로 인근에 회자되고 있다. >---- >제주도의 대표적인 동굴인 빌레못굴의 학살사례 >내가 외도지서 특공대 생활을 할 때 서북청년단 출신 경찰 이윤도의 학살극은 도저히 잊을 수 없습니다. 그날 지서에서는 소위 '도피자 가족'을 지서로 끌고가 모진 고문을 했습니다. 그들이 총살터로 끌려갈 적엔 이미 기진맥진해서 제대로 걷지도 못할 지경이 됐지요. 이윤도는 특공대원들에게 그들을 찌르라고 강요하다가 스스로 칼을 꺼내더니 한 명씩 등을 찔렀습니다. 그들은 눈이 튀어나오며 꼬꾸라져 죽었습니다. 그때 약 80명이 희생됐는데 여자가 더 많았지요. 여자들 중에는 젖먹이 아기를 안고 있던 사람도 있었습니다. 이윤도는 젖먹이가 죽은 엄마 앞에서 바동거리자 '''칼로 아기를 찔러 위로 치켜들며''' 위세를 보였습니다. 도평리 아기들이 그때 죽었지요. '''그는 인간이 아니었습니다.''' 그들을 보니 며칠간 밥도 못 먹었습니다. >---- >당시 특공대원 고치돈의 증언 >난 계엄령 직전에 대거 투입된 응원경찰과 서북청년단의 행위를 보고 '아! 이들이 무슨 밀명을 받고 왔구나'하는 느낌을 강하게 받았습니다. (중략) 그들은 우리와 상의도 없이 오자마자 총살극을 벌여 깜짝 놀랐습니다. 밀명이 없고서야 어떻게 재판도 없이 즉결 처형을 할 수 있겠습니까. 일개 순경조차도 마치 꿩 잡듯 총질을 했습니다. 그런데 계엄령이 내려질 무렵에는 주민들의 성향이 확 돌아 토벌대의 말을 잘 들었습니다. (중략) 따라서 그때부터는 한 명도 희생되지 않아도 될 상황인데 오히려 이때부터 집단 총살이 벌어진 것은 안타까운 일입니다. 1949년 1월 4일 희생된 김달소 노인은 그가 해방 직후 대포리 인민위원장을 지냈다는 죄로 처형됐습니다. 그러나 그때 인민위원장은 마치 마을 구장과 같은 것이었습니다. 그는 일제 때 구장을 지낸 경력으로 '묵은 구장'이라 불리던 분이었습니다. 주민들은 '그 어른 정도면 마을 대표감'이라 하여 추대한 것인데 그게 후에 총살의 구실이 된 겁니다. >---- >중문면 대포리 주민 이상봉(경찰 출신)의 증언 >우리 마을 북촌리에 대학살이 벌어지던 그날, 아침부터 갑자기 총소리가 나더니 군인들이 마을 동쪽부터 불을 지르기 시작했습니다. 그러면서 연설이 있으니 학교 운동장으로 집합하라 했습니다. 군인들은 우선 경찰가족, 군인가족을 따로 분리시키더군요. 낌새가 이상하다 여긴 사람들은 사돈의 팔촌이라도 경찰이 있으면 경찰가족 쪽으로 줄을 섰습니다. 군인은 우선 민보단 간부를 불러내 바로 총살했습니다. 사람들이 동요해 흩어지기 시작하자, 군인들이 사람들 머리 위로 총을 난사했는데, 그 과정에서 너댓 사람이 죽었습니다. 그 중엔 한 부인도 있었는데, '''엎혀 있던 아기가 그 죽은 어머니 위에 엎어져 젖을 빨더군요.''' 그날 그곳에 있었던 북촌리 사람들은 그 장면을 잊지 못할 겁니다. >---- >조천읍 북촌리 주민 김석보의 증언 >하루는 오후에 군인들이 오더니 '[[여러분 이거 다 거짓말인 거 아시죠|토벌 간다]]'며 마을 청년 전부를 집합시켰습니다. 우린 도시락까지 챙겨 나섰지요. 그런데 우리가 도착한 곳은 군 주둔지인 [[표선면]] 사무소였습니다. 거기서 밤새 갇혀 있는 동안 16명은 지서로 불려 갔습니다. 이튿날 남아 있던 사람들은 지서 후문 앞으로 끌려갔지요. 경찰은 무조건 '자백하라'며 [[따귀|뺨때리기]]를 시키며 구타했습니다.우린 무사히 풀려났지만 전날 호출된 청년 16명은 표선백사장에서 총살됐습니다. '''어떤 근거로 이들이 학살됐는지 모르겠습니다.''' >---- >[[표선면]] 세화1리 주민 현용석의 증언 >난 시집 식구들과 피신 생활을 했는데, 매일이다시피 토벌대가 올라와 사람이 보이기만 하면 총을 쏘았습니다. 먼저 시어머니와 시아주버니가 총에 맞아 숨졌습니다. 한번은 토벌대가 점점 다가오는데 두 살 난 여조카가 계속 울어 대는 것이 아닙니까. 동서는 발각될까 봐 급히 딸의 입을 틀어막았지요. 그런데 토벌대가 지나간 뒤에 살펴보니 그만 조카가 질식해 죽어 버렸어요. 그즈음 한 초기밭(표고버섯 재배장)에서 숨어 지내던 사람들이 끌려와 죽었다는 소문이 들려 왔습니다. 난 친정 식구가 끌려갈 때 주변에 숨었던 남동생 셋도 결국 죽었을 것이라는 생각에 그곳을 찾았습니다. 널찍한 곳에 3백여 명쯤이 숨져 있더군요. '''한겨울이라 시신은 썩지 않았습니다.''' 어린애들도 엄마한테 업힌 채로 혹은 안긴 채로 여럿 쓰러져 있었습니다. 애들을 하나 하나 들춰 보았지만 동생들을 찾을 수 없었습니다. >---- >서귀포시 서귀동 주민 정갑선의 증언 >하루에 두 번씩 마을 상황을 면사무소에 보고하는 역할이 맡겨졌기 대문에 성산포 앞바다 속칭 '터진목'에서 벌어진 학살을 전부 목격했습니다. 토벌대는 주민들을 일렬횡대로 세우고 자신들도 일렬횡대로 서서 한 사람씩 맡아 총살했습니다. 이미 혼이 나갔는지 울거나 사정하는 사람은 없었고, 너무 목이 말랐는지 죽기 전에 바닷물을 떠먹는 사람도 있었습니다. 수백 구의 시신이 바닷물에 쓸려 가기도 하고 목만 남아 뒹굴기도 했습니다. 총살극이 연일 벌어졌는데, 나중엔 총소리만 들어도 '아! 오늘은 몇 명 정도 죽었겠구나'라고 생각할 정도였습니다. >---- >성산면 성산리 주민 조유삼의 증언 >1949년 1월 3일 이른 아침 허름한 갈중의를 입고 총을 든 무리가 제주읍 도평리에 들이닥쳤다. 이들은 길에서 마주친 주민들에게 "동무, 동무"하며 악수를 청했고, 어떤 이는 인공기를 들고 있었다. 이들은 집안에 들이닥쳐 "왜 너희들은 산에 협조하지 않느냐"고 다그치면서 주민들을 학교 운동장에 집결시켰다. 그런데 인공기를 들고 갈중의를 입은 이 무리는 무장대가 아니라 인근 외도지서 경찰과 특공대원으로서 주민들에게 함정을 판 것이었다. 주민들 중 일부는 그 무리 중에 안면이 있는 사람들을 발견하고는 함정에 빠지지 않으려고 안간힘을 썼다. 양경하는 "빨갱이면 맞서 싸우겠다"고 나섰다. 마을 유지인 김병해는 외도지서 주임 김영철에게 욕을 하면서 "대한민국 만세!"를 외쳤다. 그러나 이들을 포함해 주민 70명 가량이 총살당했다. 한 증언자는 "환갑이 넘은 김성규라는 분은 학교운동장에서 지목 당하는 바람에 부인, 아들, 며느리, 어린 손자 등과 함께 6명이 몰살당했다"고 증언했다. >---- >제주읍 도평리의 학살사례 >4.3 발발 이듬해 봄으로 기억되는데, 금덕리에서 소개온 한 처녀가 하귀지서에 끌려와 매일 전기고문을 받았어요. 사라진 오라버니를 찾아내라는 게 빌미였지요. 그녀는 고문을 견디다 못해 몰래 도망쳐 바닷가에 숨었지만 며칠 후 결국 경찰에 붙잡혔지요. 경찰들은 하귀국교 동녘 밭에 남녀 [[대한청년단]]을 모두 집합시킨 후 그녀를 끌고 왔습니다. (중략) 우리 앞에 끌려왔을 때 그녀는 이미 초주검 상태였습니다. 그러나 경찰은 그녀를 홀딱 벗긴 후 "여자니까 대한청년단 여자대원들이 나서서 철창으로 찌르라"고 명령했습니다. 우린 기겁을 했지요. 누가 나서서 찌를 수 있다는 말입니까. 그러나 "찌르지 않으면 너희들이 대신 죽을 것"이라고 협박하는 바람에 단장인 한 여자가 나서서 먼저 찔렀어요. 경찰은 모두 한번씩 찌르라고 했습니다. 눈뜨고 볼 수 없을 지경이었어요. 내 차례가 되기 전에 그 처녀는 이미 죽었습니다. 집에 들아온 후 토하고 밥도 못 먹고 난리가 났어요. (중략) 내가 죽어서야 잊혀질 일입니다. 그런데 경찰들은 그녀에게 몹쓸 짓을 하려다 안되니까 그렇게 한 것입니다. 그래서 한 친구는 '''"몸을 줬으면 살 수도 있었을텐데..."'''라며 안타까워 했습니다. >---- >애월면 용흥리 주민 김계순의 증언 >미친 짓거리는 점점 심해져 갔다. 연행자들을 학교 운동장에 모아놓고 남녀 모두 옷을 벗긴 후 강제로 성행위를 시키다 총살한 일도 있었다. [[4.19 혁명]]으로 자유당 정권이 무너지고 국회에 양민학살 진상규명 특위가 구성되었을 때 한 증언자는 제주도를 찾은 국회의원에게 "군인과 서북청년단들이 처모와 사위를 대중이 모인 가운데서 정조를 맺게 하고 총살시켰다"고 폭로했다. >---- >김종민, 「제주 4.3 항쟁 - 대규모 민중학살의 진상」, 역사비평 1998년 봄호 >토벌대는 큼직한 장작으로 무지막지하게 때렸어. 그러다가 여자고 남자고 할 것 없이 모두 옷을 홀랑 벗겼지. 나는 당시 마흔 살이었는데 체면이고 뭐고 가릴 여지가 있나. 그냥 옷을 벗으라고 하니 벗을 수밖에. 토벌대는 옷을 벗긴 채 장작으로 매질을 했어. 그러다가 싫증이 났는지 얼마 지나지 않아 처녀 한 명과 총각 한 명을 지명해 앞으로 불러내더니 모든 사람들이 보는 앞에서 [[성관계|그 짓]]을 강요하는거였어. 인간들이 아니었지. 그러다가 날이 저물어가자 주민 4명을 끌고 가 총을 쏘아버렸어. >---- >「4.3을 통해 바라본 여성인권 피해사례」(오금숙)에 나오는 학살사례 >날이 막 밝아올 무렵에 총소리가 요란하게 났습니다. 그러나 설마 사람을 죽일 거라고는 생각하지 못했습니다. 난 집으로 들어와 불을 붙이는 군인들에게 무조건 "살려줍서, 살려줍서"하며 손으로 막 빌었어요. 그러나 군인들은 나를 탁 밀면서 총을 쏘았습니다. 세 살 난 딸을 업은 채로 퍽 쓰러지자 아홉 살 난 아들이 "어머니!"하며 내게 달려들었어요. 그러자 군인들은 아들을 향해 또 한발을 쏘았습니다. '''[[사이코패스|"이 새끼는 아직 안 죽었네!"]]'''하며 아들을 쏘던 군인들의 목소리가 지금도 귓가에 쟁쟁합니다. 아들은 가슴을 정통으로 맞아 심장이 다 나왔어요. 그들은 인간이 아니었습니다. (중략) 그때까지만 해도 딸까지 총에 맞았으리라곤 생각지 못했습니다. 그런데 등에서 아기를 내려보니 담요가 너덜너덜하고 딸의 다리는 손바닥만큼 뻥 뚫려 있었습니다. 내 옆구리를 관통한 총알이 담요를 뚫고 딸의 다리까지 부숴 놓은 겁니다. >---- >조천읍 교래리 주민 양복천의 증언 >그날 새벽부터 마을 사람들이 우리집에 모여 조부모 장사 일을 거들고 있엇습니다. 그런데 아침 식사를 마치고 오전 8시경 막 발인하려는 차에 경찰관 서너 명이 들이닥쳤어요. 그들은 우리를 인근 밭으로 끌고 가 죽 앉혀 놓더니 주민들이 보는 앞에서 총을 난사했습니다. 가족 모두가 쓰러졌습니다. 그런데 내게는 총알이 모두 비켜 갔습니다. 난 '''어린 마음에도 죽은 척하고 있어야 산다는 생각'''에 경찰이 가버릴 때까지 숨죽이고 있었습니다. >---- >중문면 회수리 주민 이상하(당시 13살)의 증언 >1949년 1월 25일 제주도 오라리. 한국군 2연대의 미군고문관이 남자, 여자, 그리고 어린이들의 시체 97구를 발견했다. 각 시체는 5~6발의 총을 맞앗다. 빈 클립과 탄피로 볼 때 M-1 소총이 사용됐다고 여겨진다. 그러나 경찰과 군은 그 사건에 관여했음을 부인했다. (중략) 1949년 2월 20일 도두리에서 76명의 반도들이 민보단에 의해 죽창에 찔려 죽었다. 사망자들 중에는 5명의 여인과 중학생 정도 나이의 많은 아이들이 포함돼 있었다. 경찰과 군기대(한국군 헌병)이 그 작전을 감독했다. >논평 : 4명의 미군사고문단이 도착했을 때 38명은 이미 처형돼 있었고 38명의 처형은 우연히 목격됐다. >---- >USAFIK, G-2 Periodic Report, 1949년 기록 中 >경찰은 도피자를 찾아내라며 주민들에게 총동원령을 내리다시피 했습니다. 그래서 도피자의 부모나 아내, 또는 동생들까지 동원돼 나섰던 겁니다. 그런데 군인들 작전에 걸렸어요. 경찰이 주민들을 다그쳐 산으로 보냈으면 이 사실을 산악에서 작전 중인 군인에게 알려야 했던 것이지요. 그러나 '''[[이뭐병|경찰과 군인 간에 서로 정보 교환이 없었던 겁니다.]]''' 희생된 분들은 마을의 원로급 어른들이었습니다. 그들의 모습과 나이만 봐도 사정을 알 만할 텐데 군인들은 즉각 총살했습니다. >---- >[[서귀포시]] [[토평동(서귀포)|토평동]] 주민 오인건의 증언 >1949년 1월 10일 또 한 차례 집단 총살극이 벌어졌다. 희생자들은 어처구니없게도 '''특공대원'''이었다. 당시 토벌대는 마을을 경비하는 민보단 외에 토벌작전에 동원키 위해 젊은이들로 하여금 '특공대'를 조직케 했다. 그러자 특공대장 이원하는 마을을 지키기 위해서는 무장을 해야 한다며 군대에 무기를 요청했다. 그런데 군에서는 이원하를 총살하고 사흘 후인 1월 10일에는 나머지 특공대원들을 호출해 모슬봉 기슭으로 끌고 가 집단학살하였다. >---- >대정면 하모리에서의 학살사례 >나는 대한청년단 분대장을 맡고 있었습니다. 하루는 아침에 정기보고를 하러 지서에 갔더니, 남편이 입산했다는 이유로 젊은 여자 한 명이 끌려와 있었습니다. 그런데 정 주임(서북청년단 출신 경찰)은 웬일인지 총구를 난로 속에 넣고 있더군요. 그러고는 젊은 여자를 홀딱 벗겼어요. 임신한 상태라 배와 가슴이 나와 있엇습니다. 정 주임은 '''[[성고문|시뻘겋게 달궈진 총구를 그녀의 몸 아래 속으로 찔러 넣었습니다.]]''' 차마 눈 뜨고 볼 수 없는 광경이었습니다. 정 주임은 그 짓을 하다가 지서 옆 밭에서 '''머리에 휘발유를 뿌려 태워 죽였습니다.''' 우리에게 시신 위로 흙을 덮으라고 했는데 '''아직 덜 죽어있던 상태'''라 [[생매장|흙이 들썩들썩 했습니다.]] [[자업자득|정 주임 그놈은 오래 살지도 못했다고 합니다.]] >---- >제주읍 삼양리 주민 고봉수의 증언 >토벌대는 학교 옆 '버리왓'이라는 곳에서 '''총살을 할 때 우리를 모두 [[초등학교|학교]] 밖으로 나오게 해 구경시켰습니다.''' 토벌대는 또 산에서 사람을 잡아오면 [[참수|효수]]해 [[전봇대|전주]] 위에 매달았습니다. 워낙 난리통이라 그런 걸 봐도 무덤덤했습니다. >---- >중문면 중문리 주민 원응두[* 이분의 아들이 그 유명한 [[원희룡]]이다.](당시 중문국민학교 학생)의 증언 >군인들은 두 사람(김무길, 송해옥)을 M-1소총 개머리판으로 무자비하게 구타하다가 총살했습니다. 그런데 이들은 사상은커녕 낫놓고 기역자도 모르던 순박한 [[농부]]들이었습니다. 김무길 씨는 부인도 없이 어린 자식을 혼자 키우던 사람인데 총살 직전 거의 실신 상태에서도 어린 자식이 걱정됐는지 '''"내 새끼야, 나 죽엄쩌!"'''하며 막 울부짖으며 고함치던 게 지금도 귀에 생생합니다. >---- >대정면 신평리 주민 고달순의 증언 }}} || '''초토화작전은 1949년 2월까지 계속되었다.''' 토벌대의 학살은 수많은 마을을 파괴시키고 제주도의 인구를 급감시켰다. 미군 보고서는 "지난 한 해 동안 1만 4,000명~1만 5,000명의 주민이 사망한 것으로 추정되며, 이들 중 최소한 80%가 토벌대에 의해 살해됐다. 섬에 있는 주택 중 약 1/3이 파괴됐고, 주민 30만 명 중 약 1/4이 자신들의 마을이 파괴당한 채 해안으로 소개당했다"[* 제주도 주민들이 해안가에 몰려사는 이유는 흔히 해안가에 물이 존재해서 그렇다고 알려졌지만 실제로는 중산간지대에 사는 사람들도 많았다. 더구나 중산간 일대에 나름의 반촌 성격의 집성촌이 많았다. 하지만 4.3 사건을 겪으면서 죄다 초토화되었고 완전히 폐허가 된 채 복구되지 못한 마을도 많다.]면서 그 참혹한 실상을 보고했다. 제주 4.3 사건 동안 발생한 대부분의 인명, 재산 피해는 이 초토화작전 때문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비록 소수였지만 학살을 막기 위해 애쓴 사람들도 있었다.''' 모슬포경찰서장이었던 문형순은 군경의 강압으로 인해 100여 명이 자수하여 학살될 위기에 처했을 때, 도움을 주어 이들이 살아날 수 있도록 했다. 또 성산포경찰서 서장으로 일하면서 [[6.25 전쟁]] 당시의 4.3 관련 예비검속자 학살을 부당하다며 거부하기도 했다. 그런가 하면 서귀포시 남원면 신흥리의 구장인 김성홍은 군경의 물음에도 자신은 "모른다"고 일관하여 혹시 모를 마을 주민들의 학살 피해를 막아주어 '몰라구장'이라는 별명을 가졌다. 위미리 출신 순경이었던 강계봉은 서귀포시 표선면 가시리의 주민들의 희생을 막고자 애썼고, 서북청년회(!) 단원이었던 고희준도 성산포 지역에서 무고한 주민들을 도와주었다. 또 경찰이었던 장성순은 귀순한 사람들을 처벌하지 않고 풀어주었으며, 이북 출신이었던 방 씨(본명은 미확인)는 상관의 학살 명령에 총기가 미작동한다며 명령 이행을 거부했다.[* 이렇게 서북청년단 중에도 의인이 있었던 이유는 이들이 단순히 배우지 못했거나 공산주의를 혐오하는 사람들로만 구성된 것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사실 서북청년단의 전신격인 단체들의 대부분이 북한에서 조금 잘 살거나 주민들에게 밉보여 김일성에게 땅, 집 등을 빼앗긴 사람들이 모여 만든 일종의 친목단체였다. 그러나 이 단체가 38선 이북의 사회주의자들에 대한 증오, 남한마저 공산화당하면 말 그대로 조국을 떠나야 한다는 강박관념에 휩싸이면서 공산주의를 극도로 배척하게 된 것이다. 한마디로 이들도 급변하는 한반도 정세 속에서 고향과 삶의 터전을 잃은 실향민들이자 이데올로기로 인해 고통받은 또 다른 역사의 피해자들이었다. 물론 그러한 점들이 '''그들이 저지른 범죄에 대해 면죄부가 될 수는 없다.'''][* 이 의로운 사람들은 현재 제주 4.3 평화기념관 내에 위치한 '의인관'에서 그 행적이 알려지고 있다.][[http://www.jejusori.net/?mod=news&act=articleView&idxno=45228|#]] 물론 이 끔찍한 학살 행위가 비단 군경토벌대에 의해 자행된 것만은 아니었다. '''무장대도 반동분자 처단과 보복을 외치며 자기들에게 비협조적인 제주도민들을 학살했다.''' 구좌면 세화리, 표선면 성읍리, 남원면 남원리 등에서는 무장대에 의해서 군경 토벌대나 우익과 관련된 사람들이 무참히 살해되었고 그 수는 4.3 사건 총 희생자의 약 10~20%로 추정된다.[* 대략 3,000~6,000명선][* 무장대의 침입을 막기 위해 해안 지대의 마을들에서는 돌로 성벽을 쌓고 보초를 세워 방어를 하는 일도 빈번했다.] 쉽게 말해 당시 제주도에서는 낮에는 [[서북청년단]]의 토벌대 및 군, 경찰이 '[[빨갱이]] 색출'을 빙자한 학살을 하고 이들이 저녁에 해안가 주둔지로 철수한 이후에는 [[조선인민유격대|빨치산]]들이 내려와서는 자신들에게 비협조적이거나 살기 위해 군경에 협조한 양민들을 학살했다. 다음은 무장대에 의한 학살의 증언들이다. >세화리 민보단은 제주도에서 가장 강했다. 그 날 제주도 남로당 놈들이 전부 습격에 가담했다는 말이 있었다. 그들은 밤 9시 30분경 세 발의 총성을 신호로 일제히 공격했는데 길가로 내려오면서부터 불을 질렀다. 그리고 '''"너 남로당원이냐, 민보단원이냐"고 묻지도 않고 그냥 눈에 보이는대로 죽였다.''' 그리고 식량과 옷을 도둑질해갔다. 당시 지서엔 응원대도 있었고 지서원들도 있었는데 갑자기 기습받은 것이라 경찰들은 정문 밖으로 나와 보질 못했다. >---- >무장대의 구좌면 세화리 마을 습격 사례 >표선면 성읍리는 중산간마을이면서도 불에 타지 않은 마을이다. 토벌대가 성읍지서 소재지인 성읍리는 제외했기 때문이다. 이런 이유로 성읍리는 소개령도 내려지지 않았고 오히려 토벌대의 전진기지가 되었다. 1949년 1월 13일, 군경토벌대가 수색을 위해 나간 사이에 여러 일들이 벌어졌다. 먼저 마을에 남아 있던 경찰이 입산자의 처자식을 살해하는 일이 터졌다. 이후 오후 5시 경 무장대가 마을을 공격했다. 무장대는 보초를 서는 주민을 살해하고 2시간 동안 음식을 약탈하고 집집마다 불을 질렀다. 협조를 거부하는 사람들은 무장대에 의해 무참히 살해됐다. 이 날의 충돌로 38명의 주민이 목숨을 잃었다. >---- >무장대의 표선면 성읍리 습격 사례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